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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씨 ♡/경주최씨의역사

경주최씨가문 부자 사람들의 혈통은 이런 사람들이었소

by 양덕원세례자요한 2016. 3. 30.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신라 말의 석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고운(孤雲)은 왕경(王京)(경주) 소량부인(少梁部人)인데, ‘삼국사기열전에는 그의 선대세계(先代世系)를 알 수 없다고 했으나, ‘숭복사비(崇福寺碑)’에 의하면 아버지가 견일(肩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2세에 당()에 유학하여 5년 뒤 급제하였다.

()에서 선주률수현위를 지내고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는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문선(東文選)’ 또는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에서 그의 뛰어난 글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당말(唐末)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동양에서 고금의 문장으로 꼽힌다.

 

29세에 모국 신라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당시는 신라 말기로서 지방에서는 도적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동요되고, 신라 지배층은 이러한 사회동요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선진 당()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사회모순을 개혁해 보고자 했으나, 자생력을 잃은 신라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외직을 자원하여 부성군태수(富城郡太守)를 역임하였다.

 

그 후 지방에 호족이 대두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문인(門人)을 기르며 여생을 마쳤다.

 

그의 문인(門人) 중에 고려조에 들어 관직에 나아간 자가 많다 한다.

 

그는 고려 현종조에 들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현종 14(1023)에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뒤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고려조선조를 통하여 숭상되었다.

 

그런데 경주최씨(慶州崔氏) 선대세계(先代世系)에 관해서는

 

화숙공파(和淑公派)와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에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한다.

 

한쪽에서는 시조 이후 5()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시조 이래 계속 세계(世系)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후손은 시조인 최치원(崔致遠) 한 계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운(孤雲)과 비슷한 시기에 당()에 유학하여 고려 초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던 최언휘(崔彦撝)로 연결되는 계통도 있다.

 

최언휘(崔彦撝)는 최치원의 종제(從弟)였다. 적어도 두 계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世系)상으로 나타난 분파는 27개 파를 헤아리는데

 

그 중 화숙공파(和淑公派)(현우(玄祐))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현진(玄進))

 

어사공파(御史公派)(백륜(伯倫))밀성군파(密城君派)(())광정공파(匡靖公派)(())

 

충렬공파(忠烈公派)(광위(光位))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언휘(崔彦撝)의 처음 이름은 신지(愼之)였고, 신라 말에 쓰던 이름은 인곤(仁滾)으로 나타난다.

 

88518세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시랑(執事侍郞)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가 되었다.

 

935년 신라(新羅)가 망하자 고려(高麗)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다.

 

당시의 귀한 인사가 모두 그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관직이 대상원봉대학사한림원령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

 

그의 둘째 아들 최행귀(崔行歸)가 오월(吳越)에서 비서랑(秘書郞)을 지내고 광종의 행신(倖臣)이 되었다.

 

셋째 아들 비서(秘書)소감(少監) 최광원(崔光遠)의 아들 최항(崔沆)이 성종조에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올라 크게 현달하였다.

 

최승우(崔承祐)는 진성여왕(眞聖女王) 4(890) ()나라에 건너가 공부하고 3년 뒤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에서 공부한 학사(學士) 중에 가장 문장에 능하여 유명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 최언휘(崔彦撝), 최승우(崔承祐) 등과 함께 삼최(三崔)라 불리었다.

 

그는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로 견훤(甄萱)을 위하여 격서(檄書)를 쓰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대견훤기고려주서(代甄萱寄高麗主書)’가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문집을 '호본집(餬本集)'이라 했고 시() 10수가 전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는 고려 초에 가장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고려 성종 때의 명신 최승로(崔承老)(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그의 손자인 최제안(崔齊顔)(문하시중(門下侍中)),

 

최량(崔亮)(문하시중(門下侍中), 태자사부(太子師傅)), 최항(崔沆)(평장사(平章事)) 등이 연이어 가문의 번성에 터를 다졌다.

 

고려 후기까지도 명문으로서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충숙왕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당대의 문호로 명성을 날린 최해(崔瀣) 등은 가문을 빛냈다.

 

조선 건국 후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일문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시조 최치원(崔致遠)을 정점으로 문명을 떨친 가문이었지만,

 

조선조에 <경최(慶崔)>가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42명에 그쳤다. 상신(相臣)대제학(大提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최승로(崔承老)는 신라 말에 원보(元甫)를 지낸 은함(殷含)의 아들이다.

 

12세에 고려 태조 핲에서 논어(論語)’를 읽었는데 이를 기특하게 여긴 태조가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 되게 하고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성종조까지 계속 관직에 종사하여 성종 7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죽은 뒤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성종 1년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있을 때 성종의 구언(求言)에 대해 고려 역대왕의 득실(得失)을 논한 28()를 올렸다.

 

6()는 전하지 않고 22()만이 전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에서 역대 왕의 치적을 논하면서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佛敎行事)의 중지, 무역(貿易)의 절제(節制), 관복(官服)의 제정(制定) 등 국가의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였다.

그는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정치사상가로 고려 전기의 정치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량(崔亮)은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다 .

 

성종이 즉위 전에 사우(師友)관계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즉위하자 발탁되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참지정사겸사위경(參知政事兼司衛卿)에 올랐다.

 

병으로 사직했다가 곧 복직되어 서희(徐熙) 등과 함께 북계(北界)에서 거란(契丹)을 방어해고, 뒤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내사시랑겸민관어사동내사문하평장사감수국사(內史侍郞兼民官御事同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성종 14년에 생애를 마친 이후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추증되었고 뒤에 성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최량(崔亮)에게는 원신(元信), 원좌(元佐) 등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최원신(崔元信)은 과거에 급제하고 호부시랑(戶部侍郞)을 거쳐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렀다.

 

최항(崔沆)은 성종조에 20세로 갑과(甲科)에 올랐는데, 성종이 그 재주를 가상히 여겨 우습유(右拾遺)지제고(知制誥)에 임명하였다.

 

목종 12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한림학사로서 사부(師傅)가 되었고, 다음 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30년간 폐지되었던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케 했다.

 

1012(현종 3) 이부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1016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1020년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다음 해 검교태부(檢校太傅)수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청하현개국후(淸河縣開國侯)가 되고,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가 더해졌다.

 

매우 청렴결백해서 평생동안 다른 사람의 물건을 취한 적이 없었고, 유언으로 관에서 주는 부물(賻物)을 받지 않게 했다. 그리고 불교(佛敎)를 깊이 신봉했다. 현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최유부(崔有孚)는 사재경(司宰卿),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내사문하(內史門下)를 역임하였다.

 

최제안(崔齊顔)은 현()()()문종(文宗)4조를 섬겼으며, 관직은 호부상서(戶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고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뒤에 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학자였던 최호(崔灝)는 정종 8년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에 의해 윤렴(尹廉), 정공간(鄭公幹) 등과 함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당서(唐書)’를 새로 발간했다. 이것은 불교서적(佛敎書籍) 이외의 전적(典籍)으로는 최초로 간행된 것이다.

 

그 공()으로 포상(褒賞)되었으며 3년 뒤 예기정의(禮記正義)’ 80권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권도 간행하였다.

 

졸옹(拙翁) 최해(崔瀣)는 민부의랑(民部議郞)을 지내고 원()으로부터 고려왕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에 임명된 최백륜(崔伯倫)의 아들이며, 문창후(文昌侯)의 후손이다.

 

과거에 오른 뒤 성균학관(成均學官), 예문춘추관주부(藝文春秋館主簿)를 거쳐 충숙왕 7년 장흥고사(長興庫使)로서 원()나라에 파견되어 다음 해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했다. 이어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으로 부임했으나. 곧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만년(晩年)에는 농사를 지었으며, 저술에 힘썼고, 고려(高麗) 명현(名賢)의 시문(詩文)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門)’25권을 편수했다.

 

당대의 문호(文豪)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외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광정공(匡靖公) 최단(崔鄲)은 고려말 무장으로 이름 있던 인물이다.

 

우왕 14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 휘하로 출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고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해 창왕 즉위 후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박위(朴葳)와 함께 상주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활과 말을 하사받았다.

 

공양왕 2년 한양윤(漢陽尹)에 이어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고 1392년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됐다.

 

최경지(崔敬止)는 세조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그 6년 뒤 지평(持平)으로 발영시(拔英試)2등으로 급제했다.

 

1469(예종 1) 행예문관부응교(行藝文館副應敎)지제교시독관(知製敎侍讀官)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1470(성종 1)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각각 참여했다.

 

1476년 봉상사정(奉常寺正)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1479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그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명(詩名)이 높았다.

 

조선 전기에 현달한 인물로는 문정공(文貞公) 최숙생(崔淑生)이 있다.

 

성종 2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연산군 2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나서 수찬(修撰), 지평(持平), 헌납(獻納) 등을 역임했다. 중종 3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한 뒤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18년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최동보(崔東輔), 최봉천(崔奉天), 최계(崔誡)는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웠고, 최호(崔湖), 최진립(崔震立)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공을 세웠다.

 

최호(崔湖)는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했는데, 157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다시 장원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1594년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596년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도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시켜 공을 세웠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원균(元均) 등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앞서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의 공으로 청난공신2(淸難功臣二等)에 추록(追錄)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최진립(崔震立)1592년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1594년 무과에 급제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군(倭軍)을 공격하고, 이어 권율(權慄)을 도와 전공을 세웠다.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군사를 이끌고 용인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최상익(崔商翼)은 현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주서(注書),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10년 외직으로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자 사퇴했다.

 

숙종조의 당쟁 가운데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송추(松湫)에 은거했는데, 뒤에 다시 기용되어 승지(承旨)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선조 말의 인물로는 동학(東學)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와 최시형(崔時亨), 도끼 상소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이 있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본명은 복술(福述)이었다.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한다>는 신념으로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한다.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혀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다가 1844년부터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구도행각(求道行脚)에 나섰다. 10년 후 고향에 돌아와 도()를 닦던 중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있다는 승려에게서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를 깨달았다. 1859년 경주(慶州)에 돌아가 용담정(龍潭亭)에서 한국안민(韓國安民)의 대도(大道)를 깨우치기 위한 수도(修道)를 시작하여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포교(布敎)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과 영불 연합군의 북경침입이 있었고, 우리나라에 대한 열강의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특히 서학(西學)(천주교)의 전래는 사상풍속 면에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운(水雲)은 서학(西學)에 대응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 새 종교를 창설, 동학(東學)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동학(東學)은 제병장생(濟病長生)을 토대로 하여 동양적인 유()()() 사상을 참작,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을 기본사상으로 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했다.

 

동학(東學)은 구미일본의 침략과 지배층들의 압제, 폭정으로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에 동학(東學)교단에서는 각 지방(地方)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교도를 관장하였다.

 

1863년 수운(水雲)은 최시형(崔時亨)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로 삼은 뒤 도통(道統)을 계승시켜 교주(敎主)로 삼았다. 이 해에 정부에서는 동학(東學)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이듬해 그를 체포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사형하였다.

 

그 뒤 동학도(東學徒)들의 꾸준한 신원(伸寃)운동 결과 1907(융희(隆熙) 1)에 신원(伸寃)되었다. 이보다 앞서 1892년 그의 신원(伸寃)을 목적으로 수천 명의 동학도(東學徒)가 참례(參禮)에 모여 집회를 열었고, 이 집회가 갑오년 농민전쟁의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61년 동학교도(東學敎徒)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崔濟愚)의 후임으로 제 2대 교주(敎主)가 되었다. 1864년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했다가, 그 후 관헌(官憲)의 눈을 피해 각 지방을 전전하며 포교(布敎)에 힘썼다.

 

그 후 동경대전(東京大典)’을 간행했고, 이어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 등 경전(經典)을 완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東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宗敎)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이어 각도(各道)의 동학대표자(東學代表者)들을 집합하여 탐관오리 숙청종교(宗敎)의 자유(自由)교주(敎主)의 신원(伸寃) 등을 주장하며,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朝廷)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병식(趙秉式) 등의 탐관이 면직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용을 엄금하도록 시달했으나, 1894년 고부접주(高阜接主) 최진준(崔瑧準)이 농민(農民)과 동학도(東學徒)들을 지휘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그 조정을 위해 각지의 접주(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10여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관군(官軍)일본군(日本軍)와 공주(公州)장수(長水) 등지에서 싸웠으나 계속 참패하고 청주(淸州)로 피신해 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1907년 수운(水雲)과 함께 신원(伸寃)되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로서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였고 문도(門徒)가 수천을 헤아렸다.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 경복궁(景福宮) 중수(重修), 당백전(當百錢)의 발행 등의 정책을 강경한 논조로 탄핵하여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濟州道)에 위리안치(衛籬安置)되었다가 1875년 풀려 나왔다.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通商)이 논의되자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5()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條約)체결의 불가(不可)함을 역설하다가 다시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衛籬安置)되었다.

 

1879년 풀려나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이를 극력 반대했고, 1898(광무(光武)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다.

 

그 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의 발령을 모두 사퇴했고, 국내의 대소사건(大小事件)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배일(排日)과 매국역신(賣國逆臣)의 토멸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차례 체포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제자인 임병찬(林秉贊) 80여 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 전라도 순창에서 약4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官軍)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뒤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며 거절하고 단식 끝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