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최치원
영정(影幀)
고운 시조의 영정으로서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중요한 예로는 가야산 해인사본과 지리산 쌍계사본을 들 수 있다. 시조의 옛 소요지지(逍遙之地)인이 두 고찰(古刹)에 전래된 영정의 봉안사적과 그 년기를 분명하게 규명할 자료는 없으나 이미 오랜 세월 사우(祠宇)에 전승되어 있어서 그윽한 고격을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전자 쌍계사本은 선생님의 영정이 뭇 라한(羅漢)의 영정들과 섞여 보관되어 있음을 사문지취(斯文之趣)로 여긴 영호남(嶺湖南) 향유(鄕儒)들의 뜻을 모아 이 영정을 낙안에 있는 시조의 후손집에 옮겨 보관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집안도 영락(零落)해지고 영정을 보존하기 어렵게 되자 고운 시조님의 영정은 비바람에 얼룩짐을 면할수 없게 되었다.
조선 정조 7년(1783)계묘 10월 이를 우려한 흥양, 낙안 두 고을의 향유(鄕儒)들은 고운 선생님의 유복지향(遺馥之鄕)인 전북 태인에 있는 무성서원에 이 영정을 옮길 것을 제시함으로 실현되어서 지금까지 무성서원에 봉안되어 왔다.
그후 영정은 훼손이 심해서 봉게(奉揭)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으므로 조선 순조때 서울에서 화원을 청해서 같은 모습으로 새로 그려 이를 봉안하고 원본은 따로 보존해 왔었다.. 고종때에는 정산군수를 지낸 어용화수 제용신으로 하여금 다시 실존대로 다시 그리도록 해서 봉게하고 순조때 그린 영정 또한 별함에 보존 되어었다.
가야산 해인사本 또한 전자 쌍계사本과 같은 이유로 같은 시기에 청도의 영당으로 이안되어 오늘에 이른 듯 싶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본 영정 쌍계사本중 조선 순조때 새로 그린 영정을 사진화 한 것으로서 비교적 원본에 충실히 따랏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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