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25 6.25 때 총살을 면하게 한 새찬송가 337장(아래 악보참조) 저는 교회에는 다니지는 않지만 이글을 보며 분단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느껴봅니다.
6.25 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 어느 날, 삼팔선을 넘어 남하하던 민간복장을 한 인민군 첩자들이 미군 첩보 부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들은 피난민들 속에 끼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후퇴하는 유엔군과 우리 국군의 부대 이동을 파악해서 보고하고, 중요한 시설의 파괴와 요인암살 등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다. 당시의 전황은 유엔군과 국군이 계속 후퇴를 하는 상황에서 체포한 북한 간첩들을 감시하고 수송하고 관리하는데 많은 문제와 위험성이 따랐다. 그래서 유엔군은 이들에게 전향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이들 첩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런데 이 간첩들을 처형하기 직전에 유엔군의 한 장교가 한국군 통역장교에게 이 간첩들 중에 혹시 교회에 나가는 자가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러자, 간첩 한 사람이 가슴에 십자가를 그려 보이며 기도하는 흉내를 냈다.
이 모습을 유심히 보던 유엔군 장교는 그 간첩을 살려주기 위해서 옆으로 나가 서 있으라고 했다. 그러자 눈치를 챈 다른 간첩들도 모두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옆으로 나가 서려고 했다. 이때 유엔군 장교는 한국군 통역 장교에게 간첩들의 행동에 의심이 간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한국군 통역장교가 다시 유엔군 장교에게 잠시 귓속말을 하고 나서 “너희들이 정말 교회에 나갔다면 찬송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찬송을 정확하게 한 곡이라도 부르는 자만 옆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간첩들은 아무도 찬송을 부르지 못했고 결국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금방 탄로가 난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간첩들 중에 갑자기 한 간첩이 앞으로 나오더니 옆에 있는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찬송가 363(신찬송337장)장이었다. 1절이 끝나자 그는 다시 2절을 불렀다. 뜻밖에도 이날 통역장교는 자신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이 간첩이 부르는 찬송의 가사는 물론 박자 한 군데도 틀리지 않고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2절이 끝나자 이 간첩은 또 3절을 불렀고 4절을 부를 때는 울기 시작했다.
통역장교는 4절 찬송이 끝나기도 전에 유엔군 장교에게 다가가 이분은 교회를 열심히 다닌 분이 틀림없다고 자신 있게 증언을 했다.
그러자 유엔군 장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런데 왜 울면서 찬송을 부르지” 하고 궁금하다고 했다.
결국 이 인민군 간첩은 찬송 때문에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혼자만 극적으로 살아 남았다. 재차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사람은 인민군도 간첩도 아닌 순수 민간인이었는데, 피난길에서 이들 간첩들에게 강제로 붙잡혀서 이들과 함께 피난민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실은 교회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교회 나가는 사람을 극심하게 핍박을 했던 사람이었다. 교회도 나가지 않았고 또 교인들을 핍박했던 사람이 어떻게 찬송을 그렇게 잘 불렀을까?
내용인즉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부인이 시집을 와서 남편 몰래 열심히 교회를 다니다가 결국 어느 날 남편에게 들키고 말았다. 불같은 성격의 남편은 부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창피를 준다면서 온 동네 골목으로 끌고 다녔다. 그러나, 주일이 되어 교회의 새벽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면 부인은 오늘도 남편에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교회로 달려간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는 그 시간만은 남편에게서 받은 핍박도 매맞은 상처도 창피 당한 일도 모두 다 잊어버리는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뿐, 교회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남편은 어김없이 대문에서 기다리다가 부인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부엌으로 끌고 가 따귀를 후려치며 온갖 욕설과 함께 매질까지 하게 된다.
매를 맞고 난 부인은 부엌에서 울면서 다시 찬송을 부른다.
찬송이라도 실컷 부르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핍박 속에서 부인은 결코 중단 없이 10년 동안 교회를 다녔으며, 남편을 위한 기도도 열심히 하면서 부인의 신앙은 나날이 성숙해졌다.
특히 딸아이를 신앙적으로 키우려는 부인의 의지와 딸아이만큼은 절대 교회에는 못 보낸다는 남편의 단호한 의지가 서로 상극을 이루는 10년 세월이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부인이 유달리 이 찬송만 부르는 것은 이 찬송의 가사 내용이 남편으로부터 핍박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신의 형편과 너무나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밭에 나가 일을 할 때나 이 찬송을 항상 불렀다. 그리고 주일날 남편이 핍박을 하게 되면 마치 분이라도 푸는 기분으로 이 찬송을 더 큰 음성으로 불렀다. 그때마다 남편은 “이 천치 같은 여자야, 10년간 교회를 다니면서 노래라고 겨우 그것 하나밖에 못 배웠느냐!”고 약을 올린다.
그러면 부인은 “내가 찬송만 배우기 위해서 교회 가는 게 아니요.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지 아시오?
하나님께서 언젠가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당신을 목사로 만들지도 모르지요.”
남편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 인간이 이제는 실성을 했네 뭐! 내가 목사가 된다고?
별 희한한 소리까지 다 하네”하고 버럭버럭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남편은, 이 한 가지 찬송만 10년간을 매일같이 듣다보니 1절에서 4절까지 가사 전부를 저절로 외우게 되었고, 박자까지도 훤히 알게 된 것이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을 비유한 것일까?
그렇게 지내던 이들 부부에게도 드디어 이별을 해야 할 운명의 날이 왔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부인은 그래도 자기 남편을 살리기 위해 옷가지와 양식을 준비해서 남편에게 빨리 피난 대열에 끼어 남쪽으로 가라고 재촉을 했던 것이다.
부인은 형편을 봐서 아이들 데리고 곧 뒤따라가겠다고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남편을 억지로 밀었다.
남편은 지난날 그렇게도 자신에게 핍박만 받았던 부인과 잠시나마 헤어진다는 현실 앞에서 갑자기 그날따라 부인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부인과 딸의 처량한 모습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피난길에 오른 그 남편은 인민군 첩자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드디어 총살 직전 그야말로 죽음의 일보 직전에 자기가 그렇게도 핍박했던 부인의 찬송가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찬송가 4절을 부를 때 자신도 모르게 엉엉 울었던 것이다.
남쪽으로 넘어온 이 사람은 회개하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던 다음 날, 군당국의 협조를 얻어 휴전선 철책선을 찾아갔다.
거기서부터 도보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신의 고향마을을 바라보면서 그는 철책선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여보, 당신은 10년 세월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 없이 핍박만 받으며 살았지요. 교회 갔다 올 때마다 나는 당신의 머리채를 잡고, 그 연약한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지!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당신은 말대꾸도 없이, 그저 바보같이 찬송만 불렀지요.
그때 당신의 그 찬송이 내 생명을 구해 주었다오.
그리고 당신이 기도한대로 나는 목사가 되었소.
그런데 이제 나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요!
딸아이는 얼마나 컸는지요.
당신은 지금도 혼자 살고 있는지요.
그리고 오늘도 나를 생각하며 부엌에서 그 찬송을 부르고 있는지요.”……
밥짓는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고향 마을을 멀리 바라보면서, 휴전선의 철책선을 붙잡고 그 목사님은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