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의 간추린 역사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직후라고 할 수 있다. 『최 신부 일가의 이력서』에 의하면 최양업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인 최한기(崔漢驥)가 서울에서 살다가 신해박해를 피해 가솔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으로 왔다고 한다. 이것이 강원도에 복음이 전래된 시초가 될 것이다. 이들은 홍천의 학익동(鶴翼洞)이나 횡성의 풍수원(豊水院)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에 의하면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황심(黃沁, 토마스)은 강원도 춘천 북산(北山)으로 피난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사학징의(邪學懲義>에 의하면 그의 일가가 춘천의 관청에 붙잡혔음을 밝히고 있다. 사료에 보이는 춘천의 북산은 수로(水路)로는 북한강의 중상류에 있으며, 육로로 접근하기에는 매우 험한 곳이어서 초기 신자들이 모여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또 이곳은 188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까지 여러 개의 공소가 있었다.
신유박해로 체포되었다가 강원도로 유배를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檢, 아오스딩)과 관계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강릉, 양양, 이천(伊川), 정선, 평창, 양구, 화천 등지로 유배되었다.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신부를 도와 전국적으로 전교를 하였던 김기호(金起浩, 요한/춘천교구 제7대 교구장 김운회 주교의 고조부)는 그의 자전적인 글 『봉교자술(奉敎自述』에서 1876년 10월부터 다음해 2월 초까지 블랑 신부를 모시고, 강원도의 이천, 평강(平康), 춘천, 낭천(狼川-지금의 화천), 철원(鐵原)의 공소를 방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용인에 살던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신유박해 직후에 순교자 유족 40여명을 이끌고 강원도로 왔다고 한다. 그 곳이 정확하게 강원도의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으나, 신태보가 순교자 유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와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들은 혈연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안전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이 사실은 교우촌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1815년 4월에는 김강이(金綱伊, 시몬)가 강원도 울진에서 잡혀 원주 감영(監營)에 갇혔다가 그해 11월 옥사한 이후, 1839년에는 강원도 회양(淮壤) 출신의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 서울에서 스스로 관아에 출두하여 문초를 받다가 순교하였다. 1840년에도 춘천에서 신자 9명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박 베드로, 심 스테파노, 박 발바라, 김 막달레나 등의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884년에 작성된 파리외방전교회의 보고서는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鎭) 신부가 강원도를 맡고 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드게트 신부는 이천을 중심으로 하여, 원산과 낭천 등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김기호(춘천교구 제7대 교구장 김운회 주교의 고조부)의 『봉교자술』에도 1876년경에 이천이 전교의 중요한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78년경에는 ‘조선에 온지 얼마 안 되는 로베르(Robert, 金保錄)신부를 이천 교우들이 블랑신부에게 청하여 모셔갔다'고 서술한 점으로 보아 이 지역에 신자가 많았으며, 또한 열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천은 행정구역은 강원도에 속하였지만 황해도와 함경도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며, 강원도 내륙으로는 영서지역인 낭천까지 아울렀다. 이천 본당은 1884년 4월경 섭골에 설립되었으며, 초대 주임신부는 드게트 신부였다. 이로써 이천 본당은 강원도 동북지역과 함경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이천 본당은 1887년 원산(元山) 본당을 분가하였으며, 1896년에 포내(浦內) 본당을 분가시켰다.
본격적으로 강원도 여러 지역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며, 1920년 9월 춘천(春川) 곰실에 ‘춘천 본당'이 설립된다. 춘천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부터 북산면(北山面)에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흔적이 있다. 춘천의 또 다른 지역인 동내면(東內面)의 곰실에서는 엄주언(嚴周彦, 말딩)이 새롭게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후 열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공소 강당을 마련한 후, 풍수원의 정규하 신부와 서울 명동의 뮈텔 주교를 찾아가 사제 모시기를 간청하였다. 마침내 1920년 9월에 곰실 공소에 김유룡(金裕龍, 필립보)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풍수원 본당에서 분가하였다. 그러나 곰실이 시내에서 거리가 멀어 본당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김유룡 신부와 엄주언을 비롯한 신자들은 어렵사리 마련한 기금으로 약사리(藥師里)에 땅을 사들여, 1928년에 성당을 옮겼다. 이 성당이 현재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기틀이 되었다.
1920년 경성대목구는 함경도의 일부지역을 분리하고 당초 서울에 진출하였던 베네딕도회에 위임하여, 이에 덕원면속구(德原免屬區)가 설립되었다. 영동지역을 관할하던 안변 본당이 덕원면속구에 속하자, 경성대목구에서는 1921년 양양(襄陽) 도문(道文)의 싸리재 공소에 본당을 설립하고, 최문식(崔文植,베드로)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최 신부는 양양으로 부임한 이후 싸리재가 협소하다고 생각하여, 현재 양양 본당이 자리하고 있는 양양 읍내의 서문리(西門里)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양양 본당은 영동 지역 교회의 모본당(母本堂)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최문식 신부가 부임한 직후 그 해 1921년 6월에 서품을 받은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신부가 보좌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뮈텔문서'에 의하면 이철연 신부는 그해 12월과 1922년 1월 사이에 강릉(江陵)의 금광리(金光里)공소로 옮겨 그곳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이철연 신부는 장래를 생각하여 주문진에 터를 마련하고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1923년 11월에 주문진 본당이 설립되었다.
1923년 5월 홍천 화촌면(花村面)의 송정(松亭)공소가 풍수원에서 본당으로 분가·설립되었으나 송정 역시 홍천 읍내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읍내로의 이전을 계획하였고, 13년 후인 1936년 3대 심재덕(沈載德, 마르코)신부 때 홍천 읍내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이처럼 강원도에는 1880년대에 이천 본당과 풍수원 본당이 설립된 이후 1920년대 초에 본당이 여럿 설립되면서 신앙생활이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본당설립기의 사제와 평신도들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전교한 덕분이었다.
1938년, 교황청은 강원도 지역 사목을 경성대목구에서 분리시키면서 춘천지목구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의 사목을 성 골롬반 외반전교회에 위임하였다. 성 골롬반 외방전교회는 아일랜드에서 1916년 창설된 선교 단체로 그동안 중국에 진출하여 활동하다가, 1933년 전라남도의 목포 산정동 본당에 본부를 두면서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7년 대구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설정된 광주지목구와 1939년 4월 25일자로 경성교구에서 분리된 춘천지목구를 맡게 되었다. 초대 지목구장으로는 광주지목구장 오윈 맥폴린(O. McPolin, 林)신부가 겸임을 하였으나 임지사목(臨地司牧)은 못한 채 얼마 후에 춘천에 이미 와 있던 토마스 퀸란 신부(T.Quinlan)를 대리로 임명하였다. 이후 1940년 12월 8일 퀸란 신부가 2대 지목구장이 되었다. 퀸란 신부가 지목구장이 됨으로써 비로소 실질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당시 춘천지목구의 신자는 약 9,000여명이었으며, 본당은 11개였다. 당시 방인 사제는 5명, 골롬반회 사제는 14명이었다.
1942년 1월, 교황청은 노기남 주교를 방인사제 최초의 경성대목구장으로 임명하면서, 평양대목구장 서리와 춘천지목구장 서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노기남 신부는 춘천지목구장 서리를 맡게 된 후, 2월에 감금된 퀸란 신부를 방문하였다. 그는 1945년 8월 17일 퀸란 신부에게 춘천지목구장을 도로 인계하였다.
교구장 자리로 다시 돌아온 지목구장 퀸란 신부는 그동안 침체되어 있던 춘천지목구의 활성화를 위해서 새로운 본당을 설립한다. 1948년 홍천의 물구비 본당을 설립하고, 이 해 6월에 강릉본당에서 묵호(墨湖)본당을 분리·설립하였다. 퀸란 지목구장은 1949년에 춘천의 죽림동 본당을 분가하여 소양로(昭陽路) 본당을 설립하고, 강릉 본당에서 삼척(三陟) 본당을 분리·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주교좌 성당을 새로 짓기 위하여 성당이 있던 약사리 위의 죽림동(竹林洞)에 터를 마련하고 1949년 4월 5일 기공하였다.
해방 이후 분단이 되면서 38선 이북 지역은 북한에 남게 되었다. 즉 강원도 동북지역과 함경도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이천 본당과 포내 본당, 평강 본당의 신자 약 3천명이 ‘침묵의 교회'에 남게 된 것이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휴전선이 정해졌고 이에 따라 38선 이북에 속했던 고성군·양양군·화천군·철원군·양구군·철원군 등 7개 군이 남한에 편입되었다. 7개 군은 주로 춘천교구에 속하는 지역이다. 주교좌 성당이 1953년에 완공되었고, 속초 본당이 그 해 8월 15일에 설립되었다.
1953년 4월에 인민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시베리아를 거쳐 고국인 아일랜드로 돌아갔던 지목구장 퀸란 신부는 그 해 10월 한국에 돌아와 춘천지목구장을 도로 맡고, 또한 주한 교황사절 서리로 임명되었다. 퀸란 지목구장이 돌아왔으나 교황사절 서리라는 직무 때문에 교구의 일에 전념할 수 없었다. 1955년 9월 20일 춘천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지목구장인 퀸란 신부는 성 골롬반 축일인 11월 23일 명동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로써 퀸란 주교는 춘천교구 최초의 주교가 되었다.
퀸란 주교가 관심을 많이 기울인 것은 의료 활동을 통한 선교였기에, 1956년 춘천에 골롬반 수녀회를 초대하여, 이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골롬반 의원을 약사리 옛 성당터에 개원하였다. 또한 1961년 삼척에 골롬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셉 의원을 개원하였고, 1963년 한국에 처음 진출하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를 초청하여 이듬해인 1964년 강릉에 갈바리 의원을 개원하였다. 일반 서민이 병원에 가기 힘들던 1960년대 당시,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병원은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춘천의 골롬반의원과 강릉의 갈바리의원은 오늘날에도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지역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퀸란 주교는 1958년 효자동에 주교관을 준공하여 이곳에서 교구의 전반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좀더 효율적인 교리교육을 하기 위하여 전교 수녀를 배치하려고 하였고 그 결과 이것을 담당할 수녀들이 필요하다고 여겨 그 해결책으로 춘천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련원을 지었다.
퀸란 주교는 춘천대목구에 가톨릭 학교가 없어 젊은이를 위한 교육에 어려움이 있음을 인식하고, 1961년 성심(聖心)수녀회와 협의하여 춘천에 여자대학을 유치하기로 하였다. 퀸란 주교의 노력으로 강원도의 협조를 받아 학교 부지를 얻고, 춘천교구에서 일부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리하여 1964년 성심여자대학이 개교하였으나, 지역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1981년 춘천을 떠났다.
1962년은 한국천주교회에 매우 뜻깊은 해로서 한국에 드디어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되면서 춘천도 다른 교구와 아울러 하나의 정식 교구로 자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62년 7월 26일 퀸란 주교의 교구장 착좌식을 주교좌(主敎座)인 죽림동 성당에서 거행하였다. 그러나 정식 교구로 된지 3년 만에 춘천교구는 1965년 2월 22일, 교황청의 포교성성령에 의해 원주교구(原州敎區)를 분리·설정하였다. 지학순(池學淳, 다니엘)주교가 초대 원주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분할 당시 춘천교구 방인 사제는 1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9명이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고 나머지 4명이 춘천교구에 남게 되었다. 춘천교구에서는 골롬반 선교사제 34명이 사목하고 있었다. 춘천교구는 공식적으로 아직 골롬반 선교회에 위탁되어 있었다. 원주 교구가 분리된 다음 해인 1966년 2월 12일 퀸란 주교가 사임을 청하자 교황청에서 이를 받아들여 부주교인 스튜어트 (Thomas Stewart, 朴)신부를 5대 교구장이자 두 번째 주교로 임명하였다. 스튜어트 주교는 1960년대 후반에 전교회장 50명을 채용하여 전교를 돕도록 하였다. 1968년 스튜어트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가르침에 따라 사제 9명으로 구성된 사제 평의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교구 사목협의회도 구성하였으나, 잘 운용되지 않았다.
1969년 5월 1일자로 교황청령에 의해서 한국천주교회의 관할 구역이 재조정되었다. 그 결과 춘천교구의 강원도 횡성군과 평창군의 평창면, 방림면, 미탄면, 대화면이 원주 교구 관할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풍수원 본당과 횡성본당, 평창본당의 신자 6,000명이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대교구의 포천군과 가평군이 춘천교구에 속하게 되면서 포천본당과 청평본당, 가평본당의 신자 2,500여명은 춘천교구에 편입되었다.
교구분할과 관할구역 재조정 와중에서도 새로운 본당이 설립되었는데, 춘천시의 운교동(1965년), 화천(1965년), 양구(1966년), 속초시의 교동(1967년), 홍천군의 서석(1968년), 평창군의 진부(1968년), 춘천시의 효자동(1969년), 포천군의 운천(1970년)본당이다. 이로써 춘천교구의 본당은 모두 24개가 되었다. 1970년 당시 춘천교구의 신자수는 31,868명, 방인사제 10명, 골롬반 외방전교회 사제 29명, 프란치스코회 수사신부 2명이었다.
1972년에 춘천교구와 골롬반외방선교회는 ‘선교사의 인사권 위임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종전에는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본부에서 춘천교구에 부임하는 사제들의 인사권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을 1972년에 새 계약을 맺어 춘천교구에 파견되는 선교 사제들의 인사권을 교구장이 행사하게 되었다.
스튜어트 주교는 춘천교구를 3개 지구(춘천·영동·포천)로 나누고, 지역별 사제연수를 하도록 하였으며,
1989년 5월 5일, ‘춘천교구 설정 50주년 및 성체 대회'를 춘천 실내 체육관에서 거행하였다. 또 스튜어트 주교에 의해 『춘천교구 50년사』가 발간되었다.
1994년 11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춘천교구에서 오랫동안 바라던 방인 주교에 장 익(張 益, 십자가의 요한)신부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12월 14일 죽림동 주교좌 성당에서 세 번째 춘천주교이자 6대 교구장으로 서품· 착좌하였다. 장 주교의 문장(紋章) 표어는 ‘하나되게 하소서'(요한 17, 11)이다.
장 익 주교는 춘천교구 사목에 있어 종래의 외부의존에서 벗어나 자생력과 자율성을 키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 지역간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목의 활성화를 위하여 그동안 3개 지구였던 교구 관할 구역을 5개 지역(춘천·중부·서부·영북·영동)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지역장 사제를 임명하여, 현안에 대해서는 지역 안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도록 공동사목을 권장하였다. 따라서 주교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이 사목 과제를 함께 인식하고 충분히 논의한 다음, 주교에게 건의하는 한편 교구의 사목 방침을 함께 반영하도록 하였다. 2003년 춘천지역을 2개 지역(춘천·남춘천)으로 세분하여 춘천교구는 모두 6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 익 주교는 교회의 뜻과 규범에 따라 춘천교구의 체제를 체계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일환으로 사제평의회와 사목평의회, 재무평의회, 양성위원회, 수녀연합회, 건축위원회, 자문위원회 등을 정립하는 『규정집』을 엮어 내는 한편, 각종 신심 · 활동 단체들을 활성화하여 교구 생활에 평신도들을 적극 참여시키는 길을 텄다. 그것은 사목자와 신자 모두가 자신의 정체성을 살려 본연의 목적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성서 사목의 활성화에도 무게를 두어, 성서필사와 성서백주간 모임들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본당사목의 균형과 향상을 위해서는 특히 「춘천교구 본당 공동체 기본 구성」을 새로이 제시한 바 다른 많은 교구에서도 점차 이와 인식을 같이하여 움직이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 소홀했던 교구사 정립을 위하여 자료 수집과 정리를 맡을 교구사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곳에서는 교구사 편찬을 위하여 연구· 준비를 하는 한편, 본당사를 편찬하기 위한 교육을 하고 있다.
장 익 주교는 ‘소공동체 다지기'에 역점을 두고, 본당 공동체가 인간적 규모를 유지함으로써 신자들이 소외되는 일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착좌한 이후 춘천교구에는 모두 10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횡계(1996년), 초당(1996년), 강촌(1997년), 내면(1998년), 애막골(1998년), 퇴계(1998년), 우두(1999년), 연봉(1999년), 스무숲(2002년), 솔올(2004년)) 장 주교가 1994년 부임한 이래 춘천교구의 교세는 52,500명에서 73,000명으로 늘어났고, 방인 사제는 31명이 서품되었다.
그는 1997년 4월에 ‘빵도 하나 우리도 한 몸'이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발표하여, 북녘에 있는 동포의 식량난을 함께 해결하자고 하였으며, ‘한솥밥 한식구운동'을 벌여 이 운동은 1997년 이후 지속되고 있다.
1998년 9월 그동안 중창공사를 해온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중창식을 하였으며, 이를 기념하는 내용을 담은 『생명의 샘』을 발간하였다.
1998년 11월 12일 골롬반회 사제 크로스비 신부가 본국인 호주로 돌아갔다. 크로스비 신부가 귀국함으로써 골롬반 외방전교회 사제가 공식적으로 춘천교구에서 철수하였다.
1999년 4월 25일은 교구 설정 60년이 되는 해였는데, 이 때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말딩회관 봉헌식도 함께 하였다. 60주년 행사는 각 지역별로 실정에 맞게 진행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6월 25일 철원 월정리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회'를 전국 규모로 개최하였다. 2001년 5월 춘천교구 구역반 교재인 <좋은 이웃>을 창간하여, 매달 발간하고 있다. 2002년 2월 새로 건립한 말딩회관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앙 교육의 일환으로 명도학당(明道學堂: 3년 과정)을 개설하였다. 2003년 12월 골롬반회 크로스비 신부의 포로 수기를 『기나긴 겨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교구 이름으로 가톨릭 출판사에서 발간하였다. 크로스비 신부가 포로에서 풀려난 이듬해인 1954년 영어판으로 펴냈던 이 책은 그동안 오래 묻혀 있다가, 마침내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한국현대사와 교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주교관에서 교구청의 업무를 담당하였으나, 공간이 협소하고 불편하여 1998년부터 교구청을 새로 짓는 문제가 논의되다가, 2002년 설계가 완성되어 11월에 기공식을 하였다. 2004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3866.5㎡의 건물을 지어 축복식을 가졌다. 주교좌 대성당 중창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수한 가톨릭미술가회원들의 기여가 돋보인다.
장 익 주교는 교구 내의 어려운 이들을 적극 돕고자 사회사목국을 신설하고 춘천교구 사회복지회를 법인으로 설립하여 여러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벽지 신자들을 위한 특수 사목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에 있는 ‘현북 가정 간호의 집'(1996년)과, 인제군 기린면 소재 ‘기린 가정 간호의 집'(1998년)이 그 좋은 예이다.
청소년을 위해서는 강원도 청소년수련관과 상담소를 살레시오회에서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장애인을 위해서는 춘천의 ‘밀알 재활원'과 ‘밀알의 집', 그리고 시립 장애인종합복지관을, 강릉의 ‘애지람'과 ‘사랑의 일터'를 지어 수도자들의 도움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호스피스 사업으로는 강릉의 갈바리의원과 춘천노인전문병원인 ‘골롬반의 집'이 모범적이다.
장 익 주교가 최근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소공동체와 가정 사목이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급속하게 증가하는 무관심과 가정 붕괴를 막기 위해서 교회가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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